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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그 식당 앞 2층집을 찾으면 되겠다. 오르막 도로를 걸어갔다. 그런데 처음에 나타난 식당 앞에는 2층집이 없다. 다시 올라갔다. 식당은 있는데 앞이 아니라 옆에 2층집이 있다. 여기인가 싶어서 안에 들어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인기척이 없다. 마침 그 집 마당에 흑색 SUV가 있었다. 틀림없이 앞 차창에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을 것 것이다. 과연 앞창 아래쪽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합니다. 혹시 이 집 주인이 정씨 아닙니까?”
“아닌데요. 아니 그런데, 남의 집에 들어와서 뭐 하는 거요. 빨리 나가요”
“아이고 미안하게 됐습니다. 당장 나갑니다”
더 물고 싶은 말도 못하고 나왔다. 다시 사무소에 가서 물어볼 수 밖에, 황급히 나가자 길 반대편에서 4, 50쯤 되는 남자가 휴대전화를 들고 걸어오면서 나를 보더니
“아까 전화하던 사람이오?”
하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굴 찾아요?”
“혹시, 정태원 씨 아십니까? 그 분 딸이 식당 앞에 있는 2층집에 산다고 하는데”
“정태원 씨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 딸이 살지요”
“그럼 그 집은 얼마쯤 더 가야 됩니까?”
“2킬로 정도 더 가야 합니다”
“네, 2킬로요? 여하튼 고맙습니다”
이 오르막길을 노구를 이끌고 2킬로를 더 올라가야 하다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올라가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한참 땀을 빼며 올라갔다. 거의 2킬로쯤 올라갔다고 생각되는데, 2층집이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올라갔다. 그러자 시골 치고는 제법 번화한 동네가 나왔다. 로터리 사거리가 있고 가운데에 큰 나무가 서있었다. 사방을 보니 2층집뿐만 아니라 4, 5층 건물이 서있고 식당도 여기저기 있다. 어느 집이라고 특정 지울 수가 없다. 난감했다. 할 수 없이 다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 실례했던 사람인데요. 2킬로는 넘게 올라온 것 같은데 식당 앞에 2층집이 안 보이는데요”
“지금 위치가 어딥니까?”
“사거리 로터리인데 큰 나무가 있네요”
“지났어요. 다시 뒤로 내려가면 은하수식당이 있는데 그 앞이 찾는 집입니다”
아니, 이 사람도 미리 은하수식당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 고생을 않고 바로 찾았을 텐데.
다시 뒤로 내려가자 과연 은하수식당이 있다. 앞을 보니 2층집은 없고 4층집이 있다. “?” 어찌 되었던 가서 물어볼 수 밖에 없다. 도로에 면한 쪽은 식당인데 문이 닫혀 있어, 뒤쪽으로 돌아갔다. 현관 벨을 눌러야 하는데 몇 층 벨을 눌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옆에 회색 SUV가 주차하고 있었다. 앞 차창을 들여다보니 역시 전화번호가 있었다. 전화를 걸자 이번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옳지, 이제 찾은 것 같구나 기대하면서
“혹시 이 건물 주인 성씨가 정 씨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왜 물으세요?”
“혹시 정태원 씨를 아십니까?”
“네, 저희 아버지인데요”
“어, 그래요. 정태원 씨가 내 외가 6촌형입니다”
“어머나! 잠깐 기다리세요. 지금 내려가고 있습니다”
방금 통화했는데 벌써 내려오고 있다니? 얼핏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꽃다발을 들고 내려왔다.
“아버지를 아신다고요? 전 둘째 딸 봉희입니다”
“태원 씨가 내 외6촌형이 되는 분이지요. 큰딸이 숙희라고 기억하는데 지금도 제주시에 살아요?”
“네, 삽니다. 지금 바로 전화를 걸어볼 게요”
바로 통화가 되더니 나한테 전화를 건네준다.
“여보세요. 서울에 사는 아저씨 뻘 되는 사람이오.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아이고, 3촌을 왜 몰라요. 오셨으면 저희 집에 오셔야죠”
“실은 가족과 함께 관광하러 서귀포에 와 있는데 제주시에 갈 계획은 없고, 통화가 되었으니 이걸로 만족 해야 할 거 같네”
“아이고 무슨 섭섭한 말씀. 저희 집에 꼭 오셔야 해요”
그러자 봉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요. 지금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는데 거기 가려고 꽃다발을 가지로 집에 잠깐 들린 건데, 3촌을 만나게 되었네요.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데, 가는 도중에 서귀포로 가는 버스정류소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유! 어쩜 좋아. 우선 전화번호를 주세요. 언니와 상의해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명함을 주자 자신의 명함도 주었다. 명함에는 일주종합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 정봉희라고 적혀있었다.
“아까 로터리를 지나는데 낯선 사람이 걸어가기에 유심히 보았는데 설마 그 분이 우리 집에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어요. 꽃다발을 가지러 집에 들리지 않았으면 못 만날 뻔했네요”
한산한
시골 동네이니 낯선 사람은 눈에 잘 띄는 것 같다. 아무튼 차에 동승해서 버스정류소로 가는데 도중에
메물국수집이 있었다. 그냥 보내드리기는 섭섭하니 메밀냉면을 들고 가라고 하면서 주문해 놓고 갔다. 그렇게 우연의 연속으로 외가 친척을 만나게 되었으니 가시리에 온 목적의 반은 달성된 셈이다.
다음 날 서귀포에서 가까운 천제연폭포 등 여러 명소를 다니고, 올레시장에 가서 해산물을 먹었다. 제법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3일째는 협재로 숙소를 옮겼다. 아직 추워 해수욕 객은 없지만 서핑
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림공원, 오설록 티뮤지엄 등,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그 중, 특히 애월 한담해안산책로 1.2km를 남중국해
수평선을 보면서 걷는 기분은 상쾌했다, 석양에 수평선으로 지는 해는 절경이라고 한다. 산책로 길가 바위 틈에 나팔꽃처럼 생긴 화초가 눈에 띄었다. 처음
보았지만 하마히루가오(浜昼顔)라고 직감했다. 우리말로 갯메꽃이라고 한다.
모진
해변 바람에 잘도 견디어 꽃잎은 작지만 곱게도 피어있다. 하지만 관광이 이 글의 취지가 아니므로 이
정도로 끝내고자 한다.
3
그 사이, 봉희부터 전화가 몇 차례 있었다. 제주시 언니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으니 제주시외터미널에 11시까지 오면 픽업해서 언니 집으로 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 참에 제주시로 숙소를 옮길까 생각했으나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기가 번거로워 점심만 먹고, 다시 협재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선물을 들고 시외터미널로 갔다. 11시정각에 봉희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숙희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숙희는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40여년 전에 숙희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실로 오랜만의 상봉이었다. 관광사업을 하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떴고, 자식 가족은 따로 살고 있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자주
손자들이 집에 온다고 한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넷째 명희도 와있었다.
정태원 씨는 4대독자로 아들을 원했지만 4자매만
두었다. 외숙부도 2대째 독자로 정의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에서 전사했으니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 그런 연유로 가시리에는 동래정씨 일족이
단절된 것이다. 숙희는 70세, 봉희는 65세 명희는 56세로
셋째는 영희는 재미교포와 결혼해서 미국에 있는데 아들이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미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점심은 옥돔과 제주도 산나물이 주였고 색다른 맛이었다. 식사시간은 화기애애했다. 가시사무소를 찾아 봉희 집을 찾는데 혼났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봉희가
당장에 가시사무소로 전화를 걸어, 90가까운 나이든 어르신이 찾아 갔으면 흔한 커피 한잔 대접하지 못할망정
집까지는 안내해줄 일이지, 그럴 수 있느냐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표선면장에 전화를 걸어 불친절한 대민 자세를 한마디 하려고 생각했지만 좋은 이미지로 남기기 위해 그만 두기도 했다. 이어 4.3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가시리에도 경찰이 들이닥치고 남자들을 모조리 끌고 가 총살했다고 한다. 그래도 숨거나 도망간
사람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정태원 씨도 다락방에 숨고 음식물을 긴 막대로 건네주면 먹고, 변은 그 자리에서 보고 지냈다고 한다. 그런 정태원 씨가 6.25전쟁 때 참전하여 압록강까지 진격 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나 격전 끝에 부대원 거의 전사했는데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제주는 6.25 참화를 겪지 않았지만 혹독한 4.3사건을 겪었다. 봉희가 가시리 3397번지를 알아보니, 그 일대는 조랑말 목장으로 변해 있다고 한다. 목장 터 안에는 필시
외가 집터, 밭, 산소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따져서 무슨 소용인가, 세월의 무상을 느낄 뿐이다. 식후에 차를 내왔다. 보이차라고 했는데 풍미가 있었다. 가겠다고 하자, 숙희가 제주의 명물 옥돔, 한라산 생고사리 그리고 흑돼지 삼겹살을 냉장고에서 꺼내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 택배로 보내겠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옥돔을 사기로 했었는데 선물로 받게 되었다. 시내를
돌아보겠다고 하자 봉희가 동문시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거기서 옥돔을 사서 세종시에 사는 사위네 집으로
택배로 보냈다. 제주에 간다고 하자 여비를 보태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시리 땅을 밟았다고 해서 모친의 한을 풀어드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묵었던 응어리와
외가에 대한 망향의 정한을 이제 미련없이 버릴 수 있게 될 것 같다. 또 외가 친척도 찾게 되었고, 살갑게 대해준 숙희 자매도 먼 친척은 있지만 가까운 친척이 없어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하니, 보람 있는 만남이 되었고, 이제 나에게도 외가가 있다는 것이다. 끝
2022년 5월
김 중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