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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1

작성자 : 김중형 작성일 : 2022.07.15 16:07:01 조회수 : 619

가시리

1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대평성대

 

위 가사는 고려가요 가시리” 4절중 1련으로. 이별의 한을 주제로 한 작자미상의 가요이다1명 歸乎曲이라고도 한다.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가시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가시리라는 철자에 마음이 끌리러 글의 

서언으로 삼았다그러나 노 부모를 고향에 두고 모두 일본으로 건너간 이모와 모친 그리고 외숙부들은 다시 고향 가시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별의 아픔을 가슴에 안은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 한을 생각하면 이 고려가요의 정한이 가슴 깊이 사무친다.

 

내 외가는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3397번지. 외조부는 정상옥(鄭詳玉), 외조모는 김여수(金如水)123남매를 두셨다. 차녀인 정춘택(鄭春澤)이 내 모친으로 호적에 1908615일생이라고 적혀있는데, 우연히 

615일은 모친의 돌아가신 날이다. 외숙부는 정환휴(鄭桓烋), 이모의 이름은 지금 모른다. 이렇게 함자를 

적는 것은 글로라도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51156일로 가족과 함께 제주도 관광여행을 했다. 서귀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명소를 찾아 

관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따로 가야할 곳이 있었다. 외조부가 사시던 가시리이다. 혼자 가겠다 

하자 스케줄이 어긋난다고 가족이 반대했다. 하기야 가족 입장에서는 내 외조부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귀국했지만 모친이 그렇게 그리던 친정에 가지 못하고 43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나로서는 꼭 찾아 가야한다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는 것을 가족은 알지 못한다. 안타깝게 외조부가 사시던 곳은 돌볼 사람도 없어 흔적도 없을 것이고, 산소도 무연고자묘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가시리는 제주4.3학살사건의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으로 학살과 가옥의 소각이 심하던 곳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은 제주시, 남은 서귀포시의 2행정시로 2분되어있어,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이 폐지된 것이다. 출발 전에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가시리 지형은 한라산 동남쪽에서 표선백사장까지지완만한 사면으로 이루어졌고, 넓은 초원에 오름(기생화산)이 곳곳에 솟아, 울창한 수목 속에 6개 부락이 밀집 않고 방대한 면적에 산재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서귀포에서 성산항으로 가는 간선버스 295번이 가시리를 경유하므로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가시리까지 1시간 거리, 간선버스 요금은 제주도 각 구간 일률적으로 1200원이다.어디서 버스를 내려야 할 지 막연한 상태지만 일단 버스를 탔고 가시사무소에서 내려 달라고 기사에 부탁했다. 교통망이 사통팔달로 뻗어 도로는 잘 정비 되어있었다.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경사 도로를 오르내리며 달리는 버스 여행은 상쾌했다. 이제 모친이 그리던 친정 동네, 내 외가의 루트를 찾는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잠시 과거를 회상해본다. 1947년 재일교포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일본경찰과 충돌이 심각해지자 당시 미군정 헌병대가 나서서 단속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포단체의 10개지부 간부 10명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강제추방 당했는데, 그 중에 부친이 있었다. 그 뒤 1, 추방 당한 10명 중에 9명은 다시 돌아왔지만 부친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귀국하게 되었다. 외숙부는 나에게 학업을 마치고 가라고 했지만, 병든 모친과 동생들을 그냥 내보낼 수는 없었다. 1950년초, 고국에 와 보니 부친도 투병 중이었으니, 모친은 의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임종 무렵 신음하고 몹시 괴로워했지만 자식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여인의 긍지였을 것이다. 그 신음 소리는 자식을 데리고 귀국한 회한의 울부짖음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 신음소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모친은 가시리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와서 육지사람과 결혼하고 우리 3남매를 낳았다. 20여년 일본에서 살다 귀국했지만 그리던 친정도 가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이제 그 한을 풀어드리는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고 상념이 주마등처럼 돌고 돈다.

85년 전, 잠시 고국에 왔을 때, 모친을 따라 외가를 찾은 적이 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집을 기다시피 올라가던 일, 변소를 못 찾아 부엌에서 대변을 실례하고 시침 떼던 일, 그리고 모친의 친구를 만나러 서귀포에 갔던 일, 거기는 양산가게로 벽에 형형색색의 양산이 진열 되어있던 희미한 기억들도 있다.

상념의 나래는 일본에 있는 또 하나의 외가로 날아간다. 이모는 제주에 계실 때 같은 가시리에 사는 고도진(高道進)이라는 분과 결혼해서 일본에 건너와서 오사카에서 살았다. 그리고 외숙부도 이웃에 살았으니, 이모 댁은 모친에게는 친정이요 나에게는 외갓집이다. 어느 분의 기제사인지 모르지만 가끔 제사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모친을 따라 이모 댁에 가서 제사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 중 감주가 맛있던 기억이 난다, 이모는 일본말을 못해 나하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지만 인자하신 분으로 나를 보면 육지놈이 왔다고 귀여워해 주었다. 가끔 유학 온 외6촌되는 형이 집에 왔었는데, 한 동안 우리 집 2층에서 기거하면서 통학하기도 했다. 모친이 태원아, 태원아하던 말이 기억난다. 그렇다! 가시리에 도착하면 6촌형이라는 정태원(鄭泰元) 씨를 찾아야겠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가시리에서 오랫동안 초등학교 선생을 했었다고 하니 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버스는 어느덧 가시리에 들어섰다. 버스기사가 도착을 알려주었다. 가시리농협 앞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시사무소가 있고 가시식당이 보인다. 가시사무소로 갔다. 여직원이 문 앞에서 휴대전화로 열심히 통화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책상이 두 개 있는데 늙수그레한 남자가 앉아있다. 마을 일을 보는 사람 같아 말을 걸어보았다. 흘깃 한번 보더니 그 뿐이다.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정태원이라는 분 아십니까?”

다시 나를 보더니

글쎄요

먼 데서 반가운 마음을 안고 온 나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다. 하기야 불쑥 들어와 사람을 찾으니 절차가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앉아서 얘기하면 안될까요?”

그러자 뒤쪽에 있는 응접세트를 가리키며

그쪽에 앉으시오”  

거기 앉아서 말을 하자니 등 뒤에서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일어서서 옆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옆에서 얘기 좀 합시다

여직원의 의자인 듯, 제지하려고 했으나 무시하고 그 의자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여기 가져온 옛 호적등본이 있는데 봐주시오. 외조부가 사시던 주소가 가시리 3397 번지로 되어있는데 어디 쯤 될 거 같습니까?”

글쎄요, 번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동안 변해서 거긴 아무도 살지 않지요. 호주가 정상옥이라고 돼있는데, 이젠 가시리에 정씨 일족은 한 사람도 없어요

, 그럼 아까 물어본 정태원이라는 분을 아는지?”

알지요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요. 학교 선생 하던 분인데

그럼 그분과 가까운 사람이 있을 텐데 찾을 수 없을까요? 그 분 딸이 제주시에 산다는 건 알지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릅니다

, 그 딸은 장녀이고 둘째 딸이 가까운 데에 살긴 해요

아니, 그렇게 알면서 시원스럽게 알려줄 것이지. 뭐 이런 영감이 다 있어

그럼,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지요?”

“오른 쪽 도로를 좀 올라가면 식당이 있고, 그 앞에 있는 2층집에 살아요. 2층집이 하나밖에 없으니 찾기 쉬울 겝니다

아이고 어쨌던 고맙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얻고 사무소를 나왔다. 여직원은 그 때도 문 앞에서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 도로는 사무소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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