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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in <독자칼럼> 인천에 사는 즐거움

작성자 : 이충하 작성일 : 2021.04.17 12:25:04 조회수 : 1129

인천에 사는 즐거움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이충하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노후에 생활을 편안하게 보내고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곳 역시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은퇴 후 노후생활을 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인천으로 왔다. 인천에는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볼 수 있는 정서진과 산책길이 아름다운 인천대공원이 있다. 바다로 나가면 연평도 백령도 자월도 승봉도아름다운 섬들도 많다.

 

1969, 나는 사회의 첫발을 조달청 초급공무원으로 내딛었다. 그 때 1년 동안 근무했던 곳이 인천이다. 당시 인천시청 앞에 나의 사무실이 있었는데 연안부두(지금의 제8부도) 현장을 오가며 일하게 되었다. 오후가 되면 넓은 바다에 출렁이는 황금빛 파도가 좋았다. 온 국민이 보릿고개로 고생하고 있을 때 미국, 일본의 잉여농산물 쌀을 빌려오던 때이다.

 

갑문이 없는 시대, 인천항은 쌀을 실은 큰 배가 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멀리 외항에 정박해 있었다. 그러면 작은 예인선이 동력이 없는 부선을 끌고 나갔다. 본선 옆에 붙여대고 포장되지 않은 현미를 큰 포대에 퍼 담아 부선에 쏟아 부었다. 다음 밀물 때를 맞추어 그 부선을 연안부두로 끌고 왔다. 썰물 때는 작은 배도 접안하기 힘든 열악한 게 그 당시 부두 사정이었다. 부선과 부두 사이에 나무 널판지를 걸쳐 놓고 80킬로 한가마니씩 담아 둘러매고 하역을 하였다. 부두 인부들은 뱃사람처럼 억세야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연안부두는 그 후 인천항에 갑문이 설치되면서 제8부두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많던 부두 인부들 대신 기계 장치로 대체되어 하역을 맡고 있다

 

나는 서울 생활 40여 년이 지나 은퇴를 하였다. 2007년 다시 오게 된 곳이 주안동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단독 주택 지역에 옛날 친구들도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은퇴를 하였지만 아직 신체적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어떤 일이든 해보려고 하였지만 청력이 나빠 일손을 놓게 되었다. 사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마음이 허전하여 마치 무덤 앞으로 점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어 마음의 방황이 심할 때 인천에 와서 일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때 나는 귀가 안 좋아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음에도 흠집 없이 해낼 수 있는 일자리가 생겨 다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이 생겼다.

 

인천 노인 종합회관에서 컴퓨터 공부와 시 낭송, 글쓰기 공부도 하면서 취미가 같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시 낭송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글짓기에 응모하여 입상하기도 하였다. 지난해는 인천지하철 1호선 스크린도어에 게시할 시 작품 공모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이 지금의 내 삶에 보람을 준다.

 

근래에 무의 대교가 개통되었다. 인천공항 터미널 3층 버스정류장에서 20여 분 기다려 222번 버스를 타니 승객이 우리 부부를 합하여 모두 일곱 명이다. 영종 해안도로를 무정차로 달리니 바다를 시원스럽게 가로지른 무의 대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농로처럼 비좁은 1차선 콘크리트 포장길을 거침없이 달린다. 산골 마을길과 어우러져 핀 벚꽃 들이 한창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인천에서 산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첫 직장에서의 일을 인천에서 시작했는데 생의 마지막 역시 인천에서 장식하게 되었다. 바다와 섬들이 어우러진 인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심신을 단련한다. 나는 이곳에서 건강을 챙기며 노후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려고 한다.

 

 

- 인천 인터넷신문 독자 컬럼에 개재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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